마지막 진료는 여행을 다녀오기 전이었다. 여행의 기간이 10일이었고, 그 후에 바로 진료 예약을 해 두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온 후 바로 성당 엠티를 갔고 그 후에 감기에 걸렸다. 몸이 으슬으슬 하고 콧물도 났는데 코로나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여행지에서 구매했던 감기약을 먹으며 증상을 가라앉히고 따뜻하게 지내다 보니 일주일 정도 지난 지금 감기 기운이 다 나았다. 여행을 다녀온 직후엔 난 이제 더 이상 병원을 가지 않아도 될 것 처럼 느껴졌다. 여행지로 떠나면서 나의 걱정 불안도 다 내 방 침대에 놓고 떠났기 때문이다. 여행지에 가서는 한국의 일상에 관련한 아무 것도 떠올리지 않았다. 늘 잠에 들지 못했는데 여행지에서는 하루 종일 돌바닥 위를 걸어다녀서 인지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잠이 들기 일쑤였고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꿈을 꾸더라도 기분나쁜 꿈도 전혀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이삼일 동안은 한시 넘어까지 잠이 안오는 것에 대해 시차적응이 잘 안되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시간이 갈 수록 잠 드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 새벽 세 시는 되야 잠이 올락 말락 한다. 그 때도 정신이 맑으면 탄수화물로 된 음식들을 찾아 꺼내 먹는다. 밥을 데워 먹는 다던지 냉장고에 있는 쿠키를 꺼내먹는다던지. 그러면 포만감이 들면서 잠이 들긴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이 경직되는 것 같이 개운하지 못하다. 하지만 잠 드는 약을 먹으면서까지 약에 의지하고 싶지가 않다. 이건 나의 쓸 데 없는 고집일까? 하지만 약이 있어야만 잠이 들까봐 걱정된다. 그렇다고 지금 약 없이 잠이 드는 걸 한번이라도 성공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나는 혼자 있을 때 그 정적 속에서 자꾸만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는 것을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혼자 있으면 그 정적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음악을 틀까 하다가도 음악을 트는 데 까지도 오래 걸린다. 음악을 틀지 않고도 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높은 기대치를 나에게 부여한다. 음악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받으면 되는 건데 음악이 없어도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라는 게 욕심만 많은 것 같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그 사람을 배려해서 어떻게 하면 상대를 편하게 할까 혹은 어떻게 하면 재밌게 함께 시간을 보낼 까 고민하기 때문이다. 내가 우울하고 불안해 한다면 상대방은 얼마나 기분이 가라앉을 지를 생각하다보면 너무 싫기 때문에 아예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한다. 그런데 문제는 혼자 있을 때이다. 혼자 있기만 하면 타인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 스스로를 엄청 괴롭힌다. 내가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껴준다면 나 혼자 있을 때에도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텐데 그런 것 따위는 아예 배제시켜 놓고 사는 것 같다. 나도 혼자 있어도 마음이 평온할 권리가 있는데. 나 스스로 혼자 온전히 행복할 권리가 있는데 그걸 마음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자기를 존중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있는 걸까? 이것을 해결할 수는 있는 걸까? 나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렵다. 그것은 뭔가 죄를 짓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건 잘못된 것만 같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면 그걸로 편안한데, 나 스스로는 만족감을 느끼고 좋은 미래를 꿈꾸는게 과분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이게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 주는 일에 최근 한두 달 정도는 소홀했는데 의사선생님의 조언대로 내 기분과 생각을 알아차려 주니 이런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렴풋이 알게되었던 것이 좀 더 명확해 진다. 글을 쓰는 것은 좋은 힘이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과정을 온라인에 쓰는 이유를 잘은 모르겠다. 아무도 나를 모르지만 그래도 내 글을 보이고 싶은 걸까? 나는 늘 예술가로 살고 싶었는데 그것도 내 어떤 관념과 생각을 전시하고 싶은 나의 욕망때문일까? 나는 나를 드러내거나 앞으로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늘 긴장하는데 내가 만든 창작물은 늘 멋지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길 원한다. 글이던 그림이던 친구들 사이에서 부르는 노래던. 그런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면 되는데 나를 자꾸 하찮게 여긴다. 그런 버릇을 버리고 싶다. 나를 내가 하찮게 여길 때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양하고 반복적이다. 너는 성공해선 안 돼, 너는 그럴 자격이 없어. 넌 아빠가 이상한 사람이어서 너도 미움 받아 마땅해. 부모가 잘못하면 자식이 죄를 받아. 너는 그런 자식이지. 너는 죄를 없애기 위해 스스로 수련을 해야 해. 당연한 행복은 너에게 있을 수 없어. 죄를 씻어내야 해. 부모가 짓고 다니는 죄를 너가 다 씻어내야 해. 부모로부터도, 아빠로부터도 죄의 되물림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은 생각, 그러나 핏줄이 이어져 있어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할거라는 좌절감. 세상을 사는 동안은 어떤 끈으로 이어져 있을 거라는 믿음. 아빠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도 다 그런 것들 때문일까. 나의 해방을 위한 상대의 해방을 원하는 것. 결국 나를 위한 기도.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워 지고 싶은 욕망, 그럴 수 없다는 좌절감. 그 사이에서의 갈등. 내가 해결할 수 있을까? 내 힘으로? 나는 무력하다. 그래서 매일 무너진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약한 존재이고 매일 무너진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그들에게도 죄를 짓는 것만 같다. 이렇게 약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말이다. 강해지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은데, 거리낌없이 기뻐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즐겁고 싶은데 늘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죄의식. 잘못 태어난 생명체인것 같은 기분, 죄악덩어리인것 같은 믿음, 사랑받기엔 부족하다는 믿음, 그 마음들을 감추며 살아가야해서 힘듦. 이런 내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한다고? 퉤. 어림도 없지. 나 스스로를 매일 비웃는다. 그림을 그릴 수도 없고, 진지하게 글을 쓰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마음을 먹어야 가능할까 말까 하다. 내 친구들도 아는 내 다른 블로그에는 늘 장난스럽고 즐거운 일상들을 올린다. 그렇지만 내 썩어 문드러진 속은 아무에게도 말할 순 없다. 살아가는 고통을 내가 이겨내고 나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 후에야 작품을 만들 자격이 된다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건 사실 아닐까? 매일매일의 나를 이겨내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 오늘은 친한 언니가 집에 초대해 친한 동생과 함께 나의 브라이덜 샤워를 해 주었는데 이런 걸 받아 본 적도 예상한 적도 없어서 얼떨떨했다. 언니랑 동생이 오로지 나를 위해서 풍선도 준비하고 내가 좋아하는 연보라색 꽃으로 된 부케도 준비해서 예쁜 사진들을 많이 남겨주었다. 또 가리비와 생선 빠삐요트 요리랑 케이크에 화이트와인까지 너무 준비해준 것이 많아서 그 마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사실 가장 마음이 따뜻해졌던 순간은 언니가 뉴질랜드에 여행을 다녀와 그곳에서 산 엽서에 나의 결혼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오늘 준 것이었다. 그 글을 읽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분이 너무 가라앉아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생각해주고 이런 시간을 마련해주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사했다. 왜 나는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는데도 늘 어두운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따뜻하고 좋은 시간을 겪고 나면 내가 흔하게 하는 생각이다.
- 부케 꽃다발을 화병에 꽂았다. 물을 매일 갈아주며 일주일 간 돌보다가 스스로 드라이플라워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실패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꼭 간직하고 싶은 역대급 꽃다발이다. 드라이플라워 만드는 것을 성공한 적은 딱 한 번 있는데, 남자친구과 첫 데이트를 했을 때 남자친구가 준 꽃을 그늘에 잘 말렸더니 향기가 그대로 유지된 포푸리같은 드라이플라워가 되었다. 그래서 그걸 투명한 유리병에 넣어 리본을 묶어 보관하고 있는데 코를 갖다 대면 신기하게도 아직까지 진한 꽃향기가 난다.
- 닉네임을 '보라' 에서 '보라색'으로 바꾸었다. 보라 라는 것은 왠지 사람의 이름 같다. 보라색을 좋아해서 보라라고 지었지만 왠지 내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쓰는 기분이 들어 보라색이라고 바꾼 것이다.
병원에 가지 않은 지 20일이 넘었다
2022. 10. 9. 02:14